기생 신분에 문헌기록조차 제대로 없어

<주논개의 동상>
<주논개의 생가터를 둘러보고 있는 관광객들>

지역주민 등 매년 숭고한 殺身成仁 기려

      논 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위에

양귀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남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魂)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변영로>

<주논개 영정/사진=장수군 제공>

420여년전 풍전등화와 같은 조선의 국난을 지키려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진 '의암 주논개'는 기생 신분으로 잘못된 구전 속에 그늘진 선양으로 떠밀리기 일쑤였다.

근현대사까지 정밀한 기록은 태부족하지만, 그의 숭고한 정신을 추앙하려는 학자들로부터 제대로 정립하려는 움직임은 가열차다.

오랫동안 전북 장수군 지역에는 논개의 정신을 기리고, 지역과 학교에서는 연등제와 연극 민요, 공연 제례, 논개축제 등을 치르며 올곧은 의암 정신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의암 주논개는 1574년 9월3일,현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아버지 주달문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나 당시 장수 현감이던 최경회 현감과 인연을 맺고 부실이 된다.

그러나, 최경회 현감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순절하자, 논개는 나라와 남편의 원수를 갚기위해 기생으로 가장, 단독 거사를 결심하게 된다.

1593년 7월7일,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한 왜군들은 촉석루 연회를 벌이는데 이때 논개는 기녀로 변장후 적장을 유인한다.급기야 그는 연회가 무르익을즈음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끌어안고 진주 남강에 투신, 자결한다.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는 논개의 밀랍인형>

이로 인해 조선의 군,관,민의 사기를 진작시켜 영-호남지역을 지켜낼 수 있었다는 논개의 적개심은 조선을 수호하고 남편의 원수를 갚는 수훈을 남겼다.

오늘날 기생신분으로 인식된 그녀의 비련은 문헌조차 제대로 기록되지 않다가 그의 숭고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을 되살리려는 향토사학자들로부터 마침내 빛을 보게 된다.

논개의 표준 영정은 충남대학교 윤여환교수 작품으로 논개의 얼굴은 장수지역 신안 주씨 문중을 촬영하고, 유전 인자를 추출후 분석해 논개에 가까운 얼굴 모형을 그려냈다.

머리모양과 의상 또는 당대의 유물을 고증하는 등 과학적 기법도 동원됐다.

열 손가락지를 끼고 왜장을 수장시켜려는 결연한 자세의 역동적인 모습 또한 실증에 가깝게 표현했다.

근래들어 장수사람들은 생가터를 '논개고을'이라 부르며, 의암 주논개를 '논개님'으로도 존칭한다.

1846년 장수지역에 처음 논개 비를 세운 사람은 정주석 현감이었는데,비의 정면에는 '촉석의기 논개 생장향수명비'로 논개가 장수 태생임을 밝혔으며, 사람이 많이 다니는 장수읍 옛 시장터에 그의 넋을 기렸다.

논개가 태어난 장계면 주촌마을에는 논개가 실제 사용하던 우물과 생가 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비는 일제강점기 고등계 형사에 의해 강제로 부숴 매립위기에 처했으나, 마을 사람들이 나서 부수는 척하면서 교묘하게 땅속에 묻어두었다.

1945년 8월15일, 광복이 되자마자 닷새후인 20일 숨겨둔 비를 다시 캐내어 장수초교 뒷편의 관주산 자락으로 옮겨 햇빛을 다시보게 됐다.

비각도 세웠으나 단청은 하지 못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 때의 훼손으로 흠집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1955년 남산에 의암사가 들어서자, 남동마을 앞으로 이전했다가 1976년 논개사당이 조성되면서 제대로 된 비각이 모셔졌다.

1980년 당시 주촌초등학교의 고두영선생이 논개 일대기를 정립하고, 지역 주민들이 앞장서 이 터를 성역화하기에 이르렀다.

논개 동상을 세우고 영정을 모시며 살아있는 현장 교육장으로 활용해 자라나는 꿈나무의 호연지기(浩然之氣)와 애국 魂을 일깨워 준다.

이후 1986년 마을과 학교가 수몰되자 당시 전두환대통령의 지시로 알려진 국가예산을 투입, 마을 당산에 복원시킨뒤 2000년도 성역화 사업으로 지금의 논개 사적지로 보호되고 있다.

현지에는 주논개 생가를 들어가는 관문인 의랑루(義嫏樓)가 솟아있으며, 연못과 정자, 주논개의 석상, 의암 주논개의 사료를 정리한 전시관을 뒤로 생가터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장수=권병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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